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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편린, 남겨진 자

시간이 지나며 희미해지고 깎여 나간 어떤 날의 골목, 그리고 머물렀던 공간의 잔상.
한지 위에 스며든 묵직한 수묵과 선명하게 남은 채색의 조각들은 완전하지 않아서 더 선명한 우리 내면의 기억을 닮았다. 
흘러내리는 빗줄기 같은 배경 속에서 여러분은 어떤 조각을 발견하셨나요?
조용히 머물다 가는 기억의 한 켠이 되길 바랍니다.

허동원 < 기억의 편린 >_2026_한지에 수묵 채색, 혼합재료 사용_73cm × 53cm 

붉은 벽돌 비탈진 골목이 
비안개 속에 서서히 녹아내릴 때 
시간은 거친 먹선으로 굳어지고
마음은 푸른 웅덩이로 고였습니다

유난히 시리던 네모난 창문 하나 
그곳에 두고 온 말들은 
분홍빛 빗줄기 사이로 흩날려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내도 
더께 앉은 기억의 지층 속에는 
빛바랜 보랏빛 벽과 
비에 젖은 가로등의 침묵이 여전합니다

돌아갈 수 없어서 더 애틋하고 
선명하지 않아 끝내 품게 되는 풍경

한지의 숨결마다 고요히 새겨둔 
우리가 잠시 머물렀던, 
그 아득하고 쓸쓸한 자리.

허동원미술세상  2026.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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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원 < 야상곡 >_2026_한지에 수묵 채색, 혼합재료 사용_120cm × 80cm
야상곡(달빛 잔상)
깊은 밤, 어둠이 짙어질수록 수묵의 심연 속에서 달빛의 파편들이 은은하게 피어납니다.
한지의 깊은 결 위에 겹겹이 쌓아 올린 백색의 꽃과 서늘한 청록, 분홍빛의 텍스처는 마치 
밤하늘에 흩뿌려진 성운이자 고요히 흐르는 밤의 노래처럼 다가옵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화면 가득 번져나가는 몽환적인 달빛의 선율에 시선을 맡겨보세요.

야상곡, 달빛 잔상
먹빛 깊은 허공을 건너온 밤이 
지상 가장 낮은 곳에 내려앉을 때 
어둠은 침묵이 아니라 
꽃들이 숨을 고르는 시간이었다.

달이 쏟아낸 차가운 빛가루가 
마른 가지 끝마다 엉겨 붙어 
하얗고 둥근 꽃잎으로 터져 오르고

푸른 물안개와 흩뿌려진 분홍빛 숨결은 
보이지 않는 피아노 건반 위를 흐르는 
낮고 느린 선율이 된다.

한지의 결마다 서서히 배어든 
소리 없는 밤의 노래

빛이 머물다 떠난 자리마다 
환상처럼 맺힌 은백색 잔상들이 
어두운 우주를 고요히 밝히고 있다

허동원 < 야상곡 >_2026_한지에 수묵 채색, 혼합재료 사용_120cm × 80cm